Saturday, March 31, 2012

의대 교수가 노아의 방주가 과학적으로 가능하단다



그 많은 동물이 다 방주 안에? 
김정훈 연세대 의대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역사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회의론자들에게, 특히 많은 조롱을 받았던 성경기록 중의 하나는 아마도 창세기에 나와있는 노아의 방주일 것이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으나,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그의 가족과 동물들은 생명을 보존하였다고 한다(창 7:22-23). 그렇다면, 홍수이후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든 지상의 동물들은 과거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에서 생명을 보전하였던 그 동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노아의 방주 속에 그 많은 동물들을 한 쌍씩 실을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을까? 
없지요. 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동물만 계산하나요? 멸종되어 화석으로 발견되는 수많은 동물들은 악마가 만든 가짜인가요? 한 쌍으로 어떻게 종족을 유지할 수 있나요? 현대를 보면 개체가 몇 십 마리로 줄어 들면 유전적 다양성 상실로 이미 멸종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의대 교수인데 그런 걸 모르시나요, 모른 척 하시는 건가요?

성경은 방주의 제도를, 길이가 300규빗, 넓이가 50규빗, 그리고 높이가 30규빗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창 6:15)하고 있는데, 한 규빗을 대략 45cm으로 보면, 길이가 약 140m, 넓이가 23m, 그리고 높이가 14m가 되어, 방주의 크기는 미국의 철도 화물차량 522칸에 해당하는 부피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화물차량 한 칸에는 대략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다고 하니, 방주 안에 양을 싣는다면, 자그마치 125,280마리의 양이 들어갈 수 있게된다. 자, 그러면 이제 지상의 동물 가운데 방주에 들어갈 동물의 수를 헤아려 보기로 하자. 
열차의 화물차 한 칸에 약을 240마리 실을 수 있다고요? 그 상황이 어떤지 생각해 보셨나요? 아마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상태겠죠. 그 기준으로 동물이 사는 공간을 계산하다니,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의대 교수인데 어떻게 그 따위 주장을 하나요? 만원 버스에 사람 100명이 탈 수 있으니까 아파트 한 동 정도 공간이면 수십 만 명은 살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 같네요.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홍수로 인하여 땅에서 생명의 기식이 있는 육체가 다 멸절할 것이므로(창 6:17),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각각 그 종류대로 한 쌍씩 그 생명을 보전케 하라고 말씀하시었는데(창 6:20), 오늘날 지구상에 살아있는 동물 중 이 범주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가 소위 포유류, 조류, 그리고 파충류와 양서류라고 부르는 것들로서, 이들 모두를 합한 종의 수는 대략 17,600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 쌍씩 실으려면 35,200마리의 동물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들의 몸의 크기는 각기 다르지만, 한 계산에 의하면 이들을 크기 순으로 배열하였을 때 중간에 위치하는 동물은 대략 조그마한 쥐의 크기에 해당되며, 양보다 더 큰 동물은 대략 1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유 있게 잡아 이들의 평균 크기를 양으로 생각한다면, 방주에 실어야할 동물의 수는 결국 양 35,200마리에 해당하게되고, 앞서 말한 바대로 방주에는 125,28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으므로 이들 동물을 각종의 수대로 한 쌍씩 싣고도 그 두배 이상의 공간이 방주에는 남게된다는 계산이다. 아마도 방주의 남는 공간에는 노아의 식구와 동물들이 먹을 식량과 그들의 배설물, 그리고 통풍을 위한 여유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거에는 왜 레퍼런스가 없나요? 누가 종의 수가 17600이라고 하나요? 누가 양보다 큰 동물 종류가 11%라고 하나요? 동물들은 다들 3차원 공간에 떠서 일렬로 붙어 있었나요? 그 동물들을 구분해 넣으려면 벽과 층 등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공간은 왜 계산에서 빠지나요? 그거 다 무시해도 교수님 계산대로 하면 한 동물이 자기 몸의 4배 정도 부피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네요. 그리고 가장 자리에 있는 동물들 빼고는 햇빛도 못 보겠군요. 교수님, 일제 시대 고문 기구 아시나요? 교수님이 빛도 안 들어 오고 교수님 몸 부피의 4배가 되는 공간에서 1년 살아 보실래요? 동물들이 다들 죽은 직사각형 물건이라서 완전 밀착해서 방주에 실렸다고 보고, 남는 공간이 자기 몸의 3배네요? 코끼리가 1년에 자기 몸 무게의 몇 배의 식물을 먹고, 몇 배의 배설물을 내는지 아시나요? 동물들은 뭘 먹었나요? 종 별로 한 쌍 씩 실었는데, 사자가 먹은 식량은 뭐며, 열대/온대/한대에서 온 각 동물들을 위한 환경은 어떻게 유지되고, 동물들은 죽은듯이 그냥 가만히 있었나요? 검색해 보니 2010년까지 발견된 살아있는 포유류/조류/양서류/파충류는 약 2만 5천 종이고, 문제는 곤충이 130만 종이네요.이미 멸종되어서 화석으로 발견되는 수많은 종은 왜 계산에서 빠지나요? 130만 종의 곤충도 홍수에 다 죽었을 텐데, 하느님이 곤충은 그 후에 창조했다는 건가요?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종류(히브리어로 min)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오늘날 생물학자들이 정의하는 종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창조과학자들은 대체로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를 적어도 생물 분류학상의 *속*이나 *과*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방주에 들어갈 동물의 수는 더욱 더 줄어들게 되어 방주는 그들을 수용하고도 더욱 충분한 여유 공간을 가졌을 것이다.

생각하는 자는 믿을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막연한 추측을 떠나 실제로 계산을 해봄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정확함을 발견하게 된다. 위에서 양보다 큰 지상의 동물은 전체의11% 정도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중에서도 공룡과 같이 몸집이 큰 동물은 과연 어떻게 방주에 실었을까? 생각하는 자는... 그렇다! 동물을 방주에 싣는 목적은 그 종류를 보전하기 위함이므로, 방주에 실리는 동물은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나이(young adult)이어야 가장 생식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았을까? 공룡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집도 비례하여 커감으로, 이 나이의 공룡은 아직 그리 방주에 못 들어갈 만큼 크지는 않았지 않았겠는가?! 현대 동물을 보면 생식이 가능한 개체는 이미 거의 자신이 클 수 있는 최대 크기로 자란 것들이요. 공룡 종류가 도대체 몇 종인 줄 알고 하는 소리인가요? 도대체 전세계에 퍼져 살았던 공룡들을 어떻게 사람 몇 명이 다 산 채로 끌어다가 배에 실었나요?

한편,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홍수는 자그마치 1년여나 지속되었다고 하는데(창 7:11, 8:13), 방주 안에서 이들 동물들과 함께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 8명이 그 많은 동물들을 1년 동안이나 돌보는데 이들 8명의 사람만으로 과연 이 일이 가능하였을까? 
불가능하지요.

연구된 바에 의하면, 오늘날 기계화된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식의 가축 사육장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혀 기계화되지 않은 시골에서의 가축 사육의 경우에도 단지 한사람만의 힘으로 수백 마리의 토끼, 돼지와 송아지 등을, 혹은 수천 마리의 비둘기나 암탉 등을 돌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시골 환경에서 동물의 교배 등을 통해 보내는 시간을 포함하여 나온 계산이지만, 제한된 공간을 갖는 방주 안에서는 이 같은 일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한 사람당 더 많은 동물을 돌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만약에 각 동물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각기 그들의 우리 곁에다가 비치하는 방법으로 동물들을 방주에 배치하였다면, 동물들에게 식량을 운반하느라 보내는 시간과 노동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인데, 방주의 제도를 알려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와 비슷한 방식의 가장 효율적인 동물 관리 방법을 또한 노아에게 알려 주시지 않았겠는가? 이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8명의 노아의 가족이 한 사람당 약 4,500마리(혹은, 방주에 실린 동물을 분류학상 속의 범주로 본다면, 한 사람당 2,000마리)의 동물을 돌보는 것도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연구는 누가 한 건가요? 한 사람이 외부 사회의 아무 도움 없이 수 백 마리 동물들을 기를 수 있다고요? 똑같은 동물 수 백 마리면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하루에 2000가지 종류의 4500마리의 동물을 돌보는데, 2000종의 각각 다른 사료를 자기가 만들어 매일 관리하고 2000종이 요구하는 생활 환경을 유지/관리하고 청소하고 했다고요? 상식에 비추어 충분하다는데, 도대체 누구 상식인가요? 사료를 우리 곁에다가 배치하면 1년 동안 썩지 않나요? 교수님이 2000 종의 동물 배설물을 하루에 치워 보실래요? 교수님 말대로라면 대형 동물원을 그냥 교수님 혼자서 운영할 수 있겠네요. 물리 법칙을 위반하는 "마법"을 부리는 하느님이 뭐 어떻게 잘 해 줬겠지 이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죠. 마법을 썼다는데 더 이상 무슨 논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고 있는 동안, 방주 안에 있는 동물들은 약 1년에 걸친 적지 않은 기간을 그 속에서 보내야만 되었는데, 방주의 용량은 이들을 다 수용하고도 상당 부분의 여유 공간이 있을 만큼 넓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였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동물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면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수준의 활동 둔화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온도나 계절과 같은 주위 환경의 변화에 의하여 그 정도가 조절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한된 공간에 처하거나 몸의 필요에 따라서는 온도나 계절에 아랑곳 없이도 나타난다고 한다. 만약, 방주의 동물들이 평균 이틀에 한번정도 이 같은 활동 둔화기를 가졌다면, 노아의 8식구가 돌봐야될 동물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식량의 소비도 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만약에 동물들이 4일 중의 3일을 활동 둔화기로 보낸다면, 그 수는 더욱 줄어 한 사람당 1,123(혹은 500)마리의 동물만 돌보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권념하사(창 8:1)>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이 동면과 비슷한 동물의 활동 둔화 상태이었는지 혹은 어떤 다른 초자연적 돌보심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이들을 잊지 않고 특별히 돌보셨다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기독교 논리 두 개가 나오네요. 
1)전혀 증명되지 않은 "누가 그러더라", 이렇게 전제를 만들고,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사실로 삼아 그 후의 주장을 증명하기.
2)몰라, 내도 이해는 안 되는데, 하느님이니까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잘 하셨겠지.
무슨 동물들이 1년에 3달을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습니까? 북극곰이나 그렇겠죠. 동물들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보다 좁은 데 갇혀 있으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는 사실은 아시나요? 현대에서 그런 짓을 하면 동물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받아 상당수가 죽을 것 같은데요? 교수님 주장의 근거는 뭔가요?
다시 반복되는 하느님의 "마법" 논리는 할 말이 없네요.  

그 많은 동물이 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언뜻 보기에는 믿겨지지 않아도, 알려진 과학적 정보를 토대로 철저한 계산을 하여보면 오히려 그 역사적 사실성을 더욱 뒷받침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미국 창조 과학 연구소의 John Woodmorppe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연구하여 <노아의 방주: 그 적합성 연구>라는 역작을 내놓았니 이 주제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분은 이 책을 구하여 읽어보기를 권한다. 
교수님의 말을 객관적인 말로 다시 옮기면, …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믿겨지지 않더라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목사들이 주장하는 정보를 토대로 내 편의대로 계산을 하여 보면 오히려 성경 구절을 뒷받침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겠네요. 장님이 다른 장님한테 묻는다고, 또다른 미친 기독교 신자가 쓴 책을 더 읽어 보라는데, 그게 뒷받침이 되나요?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중에서

Wednesday, March 28, 2012

iOS, Windows, Android 일본어를 깨끗하게 보자.

Windows에서도, iOS에서도, 시스템 로캘을 한국어로 했을 경우 일본어 글꼴이 매우 보기 싫게 보인다. 이것은, 일본의 가나와 한자 등이 한글 글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글 글꼴에 들어 있는 가나는 왜 이렇게 보기 싫은 걸까? 일부러 보기 싫으라고 만든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보기 싫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일본어 글꼴로 보는 일본어와 한글 글꼴로 보는 일본어는 정말 천지 차이이다.

Windows의 경우
시스템 로캘을 영어나 일본어로 바꾼다. 이것을 바꾸려면, 제어판의 국가 및 언어 옵션으로 간 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고급 탭에서 비유니코드용 언어나 시스템 로캘 (Windows 버전에 따라 용어가 다름)을 바꾼다. 한글판 Windows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되어 있다. 이것을 바꾸고 나면 일본어가 일본어 글꼴로 표시되어 깨끗하게 보인다. 물론 한글은 한글 글꼴로 보이므로 차이가 없다. 단, 이렇게 했을 경우, 유니코드를 지원하지 못하는 구식 프로그램, 인코딩 고려 안 한 플래시 사이트들에서 한글이 깨어져 보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프로그램/사이트는 가능한 이용을 안 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가상 머신에 시스템 로캘을 한국어로 해 놓고 쓴다.

iOS의 경우
마찬가지이다. 설정에서 일반으로 들어간 후, 다국어인가 하는 곳에서 언어를 영어나 일본어로 바꾼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언어가 한국어로 되어 있을 때 영어로 바꿔도 일본어 글꼴이 나오지 않는다. 이 때에는 먼저 일본어로 갔다가 다시 영어로 바꾸면 일본어가 일본어 글꼴로 표시된다. iOS는 2007년에 만들어진 최신 운영체제이므로, 유니코드를 지원 안 하는 애플리케이션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고, 글자가 깨어져서 못 쓰는 일도 거의 없다. 대부분 별 문제가 없으나, 예를 들면 음악 태그를 유니코드가 아닌 한국어 인코딩으로 넣어 놓았을 경우 음악 태그가 깨어져 보일 수 있다.

안드로이드의 경우
마찬가지이다. 설정으로 가서 언어 및 입력에서 시스템 언어를 영어나 일본어로 바꾸면 된다. 유니코드로 되지 않은 음악 태그가 깨어져 보이거나, 일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프로그램에서 글자가 깨어져 보일 수 있다.

굳이 일본어  뿐 아니라, 영어의 경우에도 한글 글꼴에 들어 있는 영어 문자는 너무 가늘고 못 생겼다. 영어도 영문 글꼴로 표현하면 훨씬 가독성이 높고 선명하다.

전지 전능한 신과 자유 의지

이 내용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 측에서 저것을 어떻게 해명하는지는 아직 자세히 읽지는 못했다. 몇몇 일반 신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명하는 것을 몇 번 들었을 뿐이다.

전지 전능이란,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신은 그런 존재이다. 아, 그런데 그 것을 주장하고 나니,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차... 크리스천 중 누구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만은 자유 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단순하게 문제를 피해갈 수 있을까, 크리스천?

나비 효과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어떤 사건은 많은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야웨가 단지 인간에게만 자유 의지를 주었다고 치더라도, 미래는 결정될 수 없다. 적어도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예를 들어 내가 내일 무엇을 할지 야웨도 모르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치자. 야웨는 내 컴퓨터에게는 자유 의지를 주지 않았고, 이 컴퓨터가 언제 어디에 있게 될 지, 그 미래를 다 알고 있으며, 이 컴퓨터가 고장나고 말고를 야웨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치자. 내가 내일 이 컴퓨터를 발로 차서 부술까 부수지 않을까? 내가 내일 이 컴퓨터를 중고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리지 않을까? 내가 내일 이 컴퓨터로 무슨 행동을 할 지 야웨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컴퓨터의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컴퓨터 뿐 아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강에 댐을 만들 수가 있다. 강에 댐을 만들면 수많은 동물의 운명이 바뀌게 되며, 그 지역의 기후가 바뀐다. 인간이 댐을 지을지 말지 야웨가 미리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른다면, 야웨는 그 주변 기후 변화와 수많은 동물들의 생사도 모르게 된다. 이건 딜레마이다. 어떤 기독교 사이트를 가 봤더니, 신은 시간의 바깥에 있어서 그런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단다. 무슨 소리야? 구약을 보시지. 신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안 받나. 야웨가 나중에 인간이 한 일을 알고는 화를 내서 벌하는 게 한 두 번인가? 시간을 마음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건가? 기독교의 궤변과 변명은 끝이 없다. 애시당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수 백 년의 연구를 거쳐 그럴 듯하고 어렵게 꾸민 후, 변명에 변명을 거듭하고 거짓 증거와 증인을 만들어 이루어진 종교이니 어련할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를 깊게 "공부"한 사람이 "무식한 소리하고 있네, 그게 아니라..." 이러면서 나름대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 논리가 성경 구절에 기반하고 있다면 때려 치워라. 성경 자체가 사실인지 아닌지 입증이 안 되었는데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사실이라고 하니... 양보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증명을 확장해 봐야 의미가 없다. 수학 시간 증명을 봤겠지만, A가 참임을 증명해야 그 A를 기반으로 B가 참이라고 할 수 있다. A가 참인지 먼저 증명하지 않고 그것을 B가 참이라고 증명하는 데 쓰는 것은 안 된다. 그리고 증거가 없는 말장난 논리도 때려 치워라. 야웨는 시간의 밖에 있다는 등...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말장난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아무리 어렵게 빙빙 둘러 설명해 봤자 결국 허황된 것이다. 먼저 그 설명의 기반을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에 두어라. 뭐 그러면 결국 다음과 같은 말로 크리스천들은 변명을 마무리짓겠지. "종교는 과학으로 증명될 수 없다." 아, 예, 그렇지요.

오늘도 크리스천들은 뭐가 어떻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겠지. 전지 전능한 신이 있다면 미래는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고, 전지 전능한 신에게 왜 기도를 하는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당신이 기도할 내용을 다 알고 있지 않나? 뭐, 자기 암시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 자체는 웃긴 일이지.

인생은 한 번 뿐이며, 죽으면 영원히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다. 한 70살까지 살 거라고 계획을 잡고 있겠지만, 그건 베스트 시나리오이고, 사실은 내일 아침 출근길에 죽을 수도 있다. 당신은 아니더라도, 내일 아침 출근길이 죽는 사람이 한국에 적어도 한 명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짧고 귀한 시간에, 왜 보이지도, 들리지도, 있지도 않은 신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나... 세상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더 많지 않나? 그 시간에 고전 한 편을 읽어 보는 게 어떨까? 죽기 전에.

Tuesday, March 20, 2012

태종과 세종, 스티브 잡스와 팀 쿡

작년에 방송되었던 "뿌리 깊은 나무"의 초반부를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뒤로 갈수록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재미도 없었다. 초반부에 많은 사람이 기억에 남았을 대사는, 태종이 죽기 직전에 세종을 붙잡고는, (정확히는 내가 기억을 못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네가 하려는 짓은 멍청한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해 내라,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나의 가장 큰 업적은 너를 다음 임금으로 정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해라."라고 한 것일 것이다.

태종과 세종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태종은 무력을 앞세워 반대 세력들을 죽이고 절대적인 정치를 했지만, 세종은 과학과 지식, 협의를 중시했다. 그런데 태종은 세종을 왕으로 세웠다. 내가 역사를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고, 태종의 아들 중에 워낙 마땅한 인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종을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었다. 뭐 어쨌든 적어도 태종이 세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받아들인 것은 맞을 것이다. 세종이 왕이 되지 못했으면 우리 민족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끔찍하다. 정말 태종의 최대 업적은 세종을 왕으로 세운 것인 것 같다.

어제 애플의 새로운 CEO인 팀 쿡이 50조 가량을 주주들에게 배당하기로 하는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스티브 잡스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그와 같이 일하려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잘은 몰라도, 그의 고집대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대부분의 일이 진행되었으리라. 그리고 애플은 사회 기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부를 하는 일은 좋은 것이지만, 기부를 안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잡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잡스가 죽기 전인 작년에도 이미 수 십 조 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지 돌려 줄 생각은 안 했다. 어찌 보면, 잡스와 쿡의 관계가 태종과 세종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은가?

태종이 정적을 제거해 놓았기에 세종이 문화를 펼 수 있었듯이,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거대 기업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팀 쿡이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후계자로 고른 인물이, 잡스가 전혀 하지 않던 일을 한다. 현금 보유의 반이나 되는 큰 돈을 3년에 걸처 나눠 주기로 했다. 쿡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잡스가 고른 인물이라면 분명히 뭐가 있을 것이다. 잡스의 최대 업적이 팀 쿡을 다음 CEO로 세운 것이 될 수 있을까? 매년 정기적으로 나오는 애플 제품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올 해 가을도 기대한다.

워킹 데드 (Walking Dead) 시즌 2 피날레

오늘 워킹 데드 시즌 2의 피날레가 미국에서 방송되었고, 토런트 사이트에 공유되었다. (http://extratorrent.com/torrent/2643150/The+Walking+Dead+S02E13+HDTV+XviD-2HD%5Bettv%5D.html)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데, 귀신 영화같이 현실성이 없지 않으면서,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 속의 좀비는 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을 저렇게 썩어 가는 상태로 죽게 하는 바이러스는 충분히 나올 가능성이 있고, 바이러스의 특성 상, 접촉으로 감염될 가능성도 많다. 그러므로 링의 TV 귀신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그리고 긴장감을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물리면 보통 사람도 저렇게 변한다는 것이고, 조금만 물리면 전혀 되돌릴 치료제나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보게 된다. 전쟁 영화에서도 사람들이 다치지만, 중상이 아니면 치료를 하면 낫게된다. 하지만 좀비에게 긁히기만 해도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어쨌든, 오늘 시즌 2가 끝나면서 한 가지 사실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모든 사람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고, 좀비에게 물려 죽지 않더라도, 죽는 순간 그 바이러스 활성화되어 좀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좀비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진 궁금증이 하나 있는데, 이 것은 그 것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준다. 영화를 보면, 좀비들은 사람을 잡으면 팔 다리를 뜯고, 내장을  찢어낸다. 저 상태로 좀비에게 먹힌다면 뼈만 남을 것이다. 그런데, 길 거리에는 약간의 손상만 입은 좀비들이 넘쳐난다. 좀비에게 물려야 좀비가 되는데, 좀비는 사람들을 다 뜯어 먹어 버리는데 어떻게 저렇게 거의 멀쩡한 좀비들이 넘쳐날까?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냥 죽어도 좀비가 된다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좀비는 죽은 존재인데 그다지 먹지도 못하고, 생명 활동이 멈춘 상태에서 다른 곰팡이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썩지 않고, 시각과 청각을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문을 부수고 사람과 대적해 싸우는 것은 생물학/화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뭐 그래도 이 것은 드라마이니까 그냥 재미있게 보도록 하자.

오늘 시즌 피날레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대부분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만 죽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어느 정도 우연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실제 저 좀비 세상에서 살아 남은 그룹이 처음에 1000개 있었다고 치자. 운이 좋을 확률이 10%라고 한다면, 조금 지나서 10%만 운 좋게 살아 남는다. 그러면 100개 그룹이 된다. 좀 더 지나서 이번에는 10%의 운이 두 번이나 겹친 아주 운이 좋은 그룹이 10개나 남는다. 더 지나서는, 10% 운이 세 번이나 겹친 아주 운이 좋은 그룹이 하나 살아 남는다. 영화는 그 마지막 그룹을 처음부터 따라가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좀비 드라마나 영화의 결론이 깨끗했던 적은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 상태로 된 세상에서 복원이 가능할까? 그래서 이 드라마의 결론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원작 만화가 있는 것 같은데, 그 것을 보면 드라마가 재미 없게 될 것 같아 안 보련다. 다음 시즌은 이번 가을에 시작한단다. 오늘 마지막 장면에서 팔 없는 좀비 두 마리를 끌고 다니는 두건 쓴 인물이 비치면서 끝나는데, 검색해 보니 Michonne이란다. 발음이 미션일까, 미천일까? 만화 속의 좀 비현실적으로 강한 인물 같아 보이기는 한데, 다음 시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가 된다.

Saturday, March 17, 2012

진짜 살만한 키보드/마우스가 없다...

이 게 괜찮으면 저 게 안 좋고, 저 게 괜찮으면 이 게 안 좋고... 예전에는 좋은 것이 있고 단지 돈이 없어서 못 샀는데, 이제는 돈을 들이고 싶어도 마음에 드는 게 안 보인다.

나의 키보드/마우스 이력은 다음과 같다.
2000년 근처 : 얻은 표준 키보드 + 휠 달린 마우스
2002년 근처 : 위의 키보드 + A4적외선 무선 마우스
2005년 : Microsoft Wireless Comfort Desktop 4000 (키보드 + 마우스)
2007년 : 아이락스 6XXX 펜터그래프 키보드 + 위의 마우스
2009년 근처 : Microsoft Comfort Keyboard 2000 + 아이락스 무선 마우스, 스카이 디지털 무선 2.4W, 엑스지온 무선 키보드+ 마우스 세트
2010년 근처 : Microsoft Wireless Comfort Desktop 5000 (키보드 + 마우스), 저가 블루투스 마우스 2 개
2011년 : Logitech Wave Pro, Apple Wired Keyboard

그리고 오늘 아이락스 IRK01W X-Slim 실버  키보드를 샀다. 생긴 건 Apple Wired Keyboard를 그대로 베꼈던데, 키 감이 다르다. 그리고 애플 키보드에는 있는 볼륨 조절 키 등이 없다. 그냥 딱 표준 키만 있다. 그리고 선이 애플 키보드처럼 부드럽지 않아 바닥에 놓으면 쫙 펴지지 않고 구불구불하다. 오늘 마우스도 샀는데, 로지텍 M525다. 이것도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마이크로 기어 윌이 아니라서, 빠르게 스크롤할 수가 없다. 진짜 마음에 드는 키보드가 이렇게 없나...


내가 원하는 건
애플 유선 키보드(와 같은 윈도 키보드)가 무선으로 나오는 것
맥북의 키보드 같은 키보드가 독립된 무선 키보드로 나오는 것
마우스는 MX 1100 같은 모양이면서 휠을 조금씩 움직일 때 흔들리지 않는 것...

Saturday, March 10, 2012

Survival of the fittest does not mean you have to be mean.

The bad survival of fittest in American TV shows and movies

Recently I saw the last episode of The Walking Dead. In that episode, the group of people where the protagonist belongs was discussing whether they should kill a captured member of a hostile group. The guy is a young man and according to him, he did not do bad things, but he just had chosen to act with the group, because one cannot survive alone in the world where zombies prevail.

Now, most of the people agreed that they had no choice but to get rid of him otherwise he might contact the hostile group and eventually bring a bad situation to the people. One old guy defended the guy from the hostile group, saying if they killed that guy, they would become nothing different from the hostile group. The old guy continued, if they killed that guy just to be safe it would be become like the survival of the fittest, and he did not want to live in a world like that.

I saw another movie called 'In Time', and it that movie also, Darwin's survival of the fittest is used in a negative way. In the movie, a very rich guy who owns thousand years of time said it was just the survival of the fittest that other people were suffering from limited time.

Being fittest is not equal to be strong and ruthless

As we humans have evolved from simpler forms of life, so did everything that are related to us. Sure, for some animals 'fittest' means 'physically strongest', but we (except some Christians) know for us humans, it is not always true. For example, a very smart person may become a doctor and earn more money than a physically strong person who became a construction worker. The smart person may meet a better spouse, and have more chance to have attractive children who will have chances to grow up and reproduce.

Not only intelligence, but other values that we humans think are 'good' will also be appreciated. A kind, thoughtful and generous but physical weak person could meet a better spouse than a bad-tempered, rude but physical strong person does. Yes, for our human species, the survival of the fittest can actually be the survival of the persons who have the values we appreciate.

Things are not fixed as the Bible which was written in thousand years ago, things change and we have the power to change things, too. Even if the survival of the fittest meant the ruthless selfishness before, it cannot be always like that. That is what we humans are capable of.

No argumentum ad consequentiam, please.

It is a different matter whether something is true and whether something is desirable. If X is happening, no matter how you do not like the result you cannot say X is not happening. It is stupid to mention how much you do not like X, when you are debating whether X is true or not. I feel very sad when a weak young animal is attacked and eaten by other animals on TV. All humans feel the same way if he/she is not a psychopath. The survival of fittest in the animal world is often cruel, but you saw that happening on TV. That is how the living things have evolved. Evolution is fact, and if you want to disprove it, bring a single actual evidence not arguments as 'that SEEMS to be too improbable' or 'if it is true the world would be bad".

Sunday, March 04, 2012

당신이 야웨를 선하다고 할 때, 선하다는 기준은 뭐지?

지겹다, 야웨가 선하다는 주장은. 그냥 선한 정도가 아니고,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란다. 선의 극치라는 것이지. 정의와 사랑이 넘치고...

나? 나는 별로 선하지 않다. 정의와 사랑이 넘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고 있고, 내게 능력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노예 생활에서 풀어 주고 자유롭게 살게 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 선하다는 신이 어째서 "직접" 노예를 사고 파는 법을 가르치고,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것인가?

http://blog.daum.net/plus8291/1569 (레위기 25장)
http://www.youtube.com/watch?v=dDgCnoCMf9k

그건 고대 유대의 이야기잖아, 하나님이 지금 노예를 쓰라는 게 아니잖아!

변명하지 마라. 모든 것을 다 아는 야웨가 노예 제도가 나쁘다는 것을 몰랐나? 당신이 타임 머신을 타고 고대로 갔다고 치자. 초강력 무기를 같이 가지고 가서, 무력으로 모든 적을 다 물리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치자. 그 당시 사람들이 노예를 부리고 있고, 노예들이 고생하는 것을 본다면, "이 건 이 시대의 당연한 일이야" 이러면서 그대로 둘 건가? 나 같으면 다 풀어주고, 인간 평등을 가르치겠다. 나같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째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선하고 정의로운 신이 그 당시 미개한 사람들과 동조해서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거지? 그런 과거의 명령을 왜 현대인들 보고 읽으라고 염치도 없이 책에다가 적어 놓은 거지?

제발, 야웨를 선하다고 하지 마라, 제발. 아니면 선하다의 정의를 사전에서 바꾸든가.

미천한 인간의 기준으로 선악을 논하지 마라. 인간의 눈에는 나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선한 것이다.

그래, 딱 그거다. 우리가 선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준이다. 60억명 중 59억 9천 9백 9십 9만 9천 9백 9십 9명이 이렇게 하는 게 선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명은 이렇게 하는 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정신 병자나 사이코패스 등이지. 대부분의 사람의 눈에 악하게 보이고, 그게 악하지 않다고 증명할 수 없다면 그건 악한 것이다. 내가 사람을 죽이면서 내 기준으로는 이건 선한 행동이야, 이래도 아무도 안 받아 줄 것이다.

당장은 나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정의와 계획을 위해 약간 희생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이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야웨는 전지전능하고 완벽하다며? 전지전능하고 완벽한데,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희생을 하지 않는 방법을 못 찾아? 못 만들어? 예를 들어 조두순 사건 같은 것도 어린이 범죄에 대한 사회의 경각심을 일으켜 다른 사고가 일어 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며, 나영이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겠지? 그리고 대신 나영이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고? 내가 야웨라면 그런 목적을 이루면서도 나영이같이 불쌍한 피해자가 없는 방법을 택하겠다? 변명해 봐라. 똑같은 목적을 이루는 데 나영이를 희생하는 신과 나영이를 희생하지 않는 신, 어느 쪽이 더 완벽한가? 야웨가 완벽하다며?

Impossible is Heaven / 天国はありえない / 천국은 있을 수 없다.

Yeah, you heard me. It is impossible. Why? Let me explain. So you think your soul will go to heaven after you die, right? According to you, your body is detached from your 'soul' and rot on the Earth, but your 'soul' will go to a place where there is no pain, no anxiety, no worries, etc.

You have human emotions. No matter how good person you are, you have human emotions. You love someone, you want to do something and you get bored, etc. When many people lives together, inevitably their interests collide. So if your soul is just like you now, and go to Heaven and live with enormous number of other souls there, there must be collisions of interests. That will make you unhappy. Suppose you love a girl. But there could be another guy who love the same girl. You both die and go to Heaven, and you both want to be with her all the time, only you and she. But it is impossible as long as your emotions and way of thinking remain the same as on Earth.

So, Christians might insist that suddenly when you go to Heaven you lose all the desires and emotions and become peaceful. But if so, is that really you? Since your physical body is lost, the only thing that can identify you as you is your consciousness, otherwise you will be indistinguishable from other countless souls. But suddenly your consciousness changes the way you have never been? Is that really you? Just think of what Heaven really would be like.

そう、天国はありえないのだ。なぜ? 今から説明をしよう。キリスト教徒であるあなたは自分が死んだ後に天国に行くと信じているだろう。あなたによると、あなたの肉体はあなたの魂から外されて土の上で腐るが、あなたの「魂」は苦しみや痛み、愁いなどのないところに行く。


あなたは人間の感情を持っている。あなたがいくら良い人だとしても、あなたは人間の感情を持っている。あなたは誰かを愛するし、あなたは何かをしたいと思うし、あなたは退屈になったりもする。たくさんの人が一緒に住むと、人々の欲望が衝突するのは避けられないことである。もし、あなたが今のあなたの意識を持ったまま天国にいき、そこに住んでいる無数の他の存在と一書に住んだら必ずそんな衝突が生じる。それはあなたを不幸にする。例えば、あなたがある女の子を愛するとしよう。でも、この世にその女の子を愛する他の男がいる。あなたとその男は死んだ後一緒に天国に行って、天国でその女の子とふたりきりでいたいと思う。でも、もしあなたの考え方がこの世に生きている時と同じだったらそれは不可能である。


では、キリスト教徒たちはあなたが死んで天国に行ったら生きていた時の欲望や感情を全部なくして安らかな状態になる、といいかもしれない。でも、もしそうであったら、それは本当にあなたなのか? あなたの肉体はすでになくなったため、あなたの存在を区別するのはあなたの意識だけである、そうではないとあなたは他の無数な魂と区別できなくなる。でも、天国に行ったら急にあなたの意識が今までとは全然違うことに変わる? それは本当にあなたなのか? 天国のことを具体的に考えてみよ。それは矛盾だとわかってくるだろう。


그렇다, 천국은 있을 수 없다. 왜냐고? 지금부터 설명을 하겠다. 크리스천인 당신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땅에서 썩어 가겠지만, 당신의 영혼은 걱정도, 근심도, 슬픔과 불안도 없는 곳으로 간다.


당신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당신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고,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지루함도 느낀다. 당신이 죽어서 당신의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가서 수 많은 다른 영혼들과 같이 산다면 서로의 이해 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다른 남자도 있다. 당신과 그 남자는 둘 다 죽어 천국에 간다. 천국에서 당신은 그 여자와 계속 단 둘만 있기를 원하지만, 당신 의식이 지구에 있을 때와 같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여자와 단 둘만 있기를 원하는 다른 남자도 있고, 그 두 바람은 동시에 만족될 수 없으니까.


그러면 크리스천들은, 천국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가졌던 욕망과 감정이 전부 없어지고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신인가? 당신의 육체는 이미 없어졌으므로, 당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건 당신의 의식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다른 무수한 영혼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국에 가면, 당신 고유의 감정이 없어지고 더 바라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평화로운 상태로 된다? 그건 정말 당신 자신일까? 천국이 어떤 것일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라. 당신이 존재하는 그런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韓国では漢字を使わないのではないか?

いや、違う。韓国の事情は複雑だけど、短い答えは「違う。」である。


では、その理由をこれから述べよう。韓国には「ハングル」という固有の文字がある。これは15世紀に朝鮮の世宗という王が発明した文字で、24字で全ての音を表現する表音文字である。日本のひらがなのようなものだと思えばいいだろう。その前までは韓国には独立文字がなかったので、漢字だけを使っていた。しかも歴史的に韓国の古代の国の政権は支配に中国の制度を利用しようとしたので、例えば地名も人名も中国式に変えた。(現代の韓国の地名、人名は中国式) 元々もあった純粋な韓国語の単語が失って同じ意味の漢字語がそれを代替した場合も多い。例えば、日本では「あした」という日本固有の言葉がある。それを漢字の明日と表記してもそれは「みょうにち」ではなく「あした」である。多分韓国語にも明日を意味する純粋な韓国語があっただろうが、いまは漢字の「来日[r/nae-il]」という単語しか残っていない。


韓国語の語彙の相当な部分を漢字語(大体中国から伝わって漢字を並べることでできている単語)が占めている。今や日常でほとんどハングルだけて書いていても、言葉自体に漢字語があるので、それをハングルという表音文字で表記していることである。それは比喩でいえば、「私は大学で数学を勉強しています。」を「わたしはだいがくですうがくをべんきょうしています。」のように表記しているのに同じだ。ひらがなを使っていても漢字を使っていないとも言えない。


人の名前も中国式になっている。韓国語では純粋な韓国語を漢字の意味を借りて漢字で表記することはない。だから漢字はいつも漢字の音で読まれる。人の名前が漢字でできているのは日本も同じだろうが、韓国の人名は本当の漢字の発音でよまれるというのが違う。韓国の人名は苗字が一字(稀に二字である場合もある)で、下の名前が二字(時々一字である場合もある)でできている。最近は例外的に漢字を使わない下の名前も時々あるが、まだ少ない。


韓国の地名もほとんど中国式で漢字でできている。はるか昔には純粋な韓国語だった地名も朝鮮とかになって漢字に変えた場合がある。例えば、大田[dae-jeon]は昔は「はんばっ」と呼ばれたらしくて、それは文字通り大きい畑という意味である。現在韓国の都市の名前では「ソウル」を除いては全てか中国式名前なっている。


私は韓国の固有の語彙や地名、人名が失われて中国の文化に染まっている今の韓国の状況がとても悔しいと思う。でも、失われたのは仕方ないだろう。数十年まえのハングル専用政策などの影響もあって、いまはほとんど日常で漢字を使うことはない。履歴書で名前を漢字で書いたり、論文とか新聞で漢字を時々みることしかなくて、外国人の観光客のための表示版で漢字があるだけだ。しかし、果たして韓国は日本より漢字を使わないと言えるのか。

Thursday, March 01, 2012

돈 안 들이고 타임 머신 쓰기

나는 맥북(10.7.3 Lion)을 쓰고 있다. 원래 250GB 하드 디스크를 장착한 모델이었지만, 얼마 전에 그 하드 디스크를 떼어 버리고 120GB SSD를 달았다. 속도가 빨라진 것은 그렇다고 치고, 소음과 진동이 거의 없어졌다. 아주 조용해져서 이제는 전에는 안 들렸던 메인보드 고주파음이 가끔 들린다.

그런데 이러고 나니 문제점이 있다. OS X의 백업 시스템인 타임 머신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방법은...
  1. 외장 디스크를 USB로 연결한다.
  2. ODD를 떼어 내고 거기에 두 번째 HDD를 장착 후 사용한다.
  3. 네트워크 저장 공간을 사용한다.
1의 문제점은, 항상 외장 디스크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귀찮다.
2의 문제점은 기껏 조용해진 맥북이 다시 시끄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3이 가장 좋은데, 어떻게 할까? 

나는 서버 용으로 쓸 팬리스 저성능 미니 컴퓨터를 한 대 샀다. 21만 원인데, 메모리와 HDD가 없다. 메모리는 남는 4GB 하나 꽂았고, HDD는 맥북에서 떼어 낸 250GB를 달았다. SATA 디스크를 연결할 수 있어서, 데스크톱에서 떼어 낸 3.5인치 2TB 디스크를 달았다. 맥북에서야 그 2.5인치 250GB HDD가 시끄러웠지만, 데스크톱 3.5 인치에 비교하니 완전 무소음에 가까운 양반이다. 그 만큼 데스크톱 디스크가 시끄럽다. 내 구상은 평소에는 2.5 인치를 사용하다가 주기적으로 3.5를 켜서 그리로 데이터를 옮기고 다시 3.5 인치를 끄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Windows에서 HDD를 끄는 방법이나 API를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안 쓰면 저절로 꺼지기는 한다. 3.5 인치를 팔아 버리고 두 배 가까이 비싼 2.5 인치 고용량 디스크를 살까? 삼성 거 2.5인치 1TB가 12만 원 하던데...)

이 서버에 아무 OS나 설치 후 네트워크 공유 디렉터리를 만든다. Windows이면 그냥 만들면 되고, Linux면 SAMBA를 쓰면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이렇게 하면 타임 머신에서 바로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 Apple이 막아 놓은 것이다. 타임 캡설이라는, 공유기에 2TB HDD가 장착된 제품을 따로 팔고 있 는데, 이 제품은 가격이 35만 원에 정도이다. 지금은 물론 HDD 값이 워낙 뛰어서, 서버를 따로 사서 2TB HDD를 장착해서 타임 머신 서버로만 쓸 바에는 타임 캡설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서버를 쓰면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가 있다. 웹 서버도 되고, FTP 서버, MySQL 서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다. 대신 서버를 쓰면 타임 캡설보다 전기세는 더 나올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 다음 이 페이지의 설명을 따라하면 된다. (http://techpump.co.uk/?p=105) 그런데 그 페이지의 내용은 맥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므로, 내가  따라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까지 같이 덧붙이려고 한다.

먼저 Finder의 Preferences로 가서 네트워크로 마운트된 디렉터리가 Desktop에 보이게 한다. 이렇게 안 해도 하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편했다.
그런 다음 네트워크에서 원하는 공유 디렉터리로 찾아 들어간다. Windows에서는 직접 매핑을 해야 했는데, 맥에서는 그냥 한 번 열면 자동으로 마운트되어서 Desktop에 드라이브 아이콘이 나온다.
그 다음 여기있는 ZIP 파일을 받아 연다. 확장자가 안 보이면 이름이 똑같이 보이는 파일이 두 개 있는데, 화살표가 있는 게 진짜다. 그 위로 아까 열여서 Desktop에 보이는 드라이브 아이콘을 드래그 앤드 드롭한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오류가 발생했다.
access for assistive devices is disabled...
검색을 해 보니 터미널에

sudo touch /private/var/db/.AccessibilityAPIEnabled
라고 치면 해결되었다. (출처: http://hints.macworld.com/article.php?story=20060203225241914)

아는 사람이 실행하니
view of class mbar 1 of class pcap system preferences of application system event를 가져올수없습니다
이런 오류가 발생했단다. 시스템 언어를 영어로 바꾸고 나서 하니 우연의 일치인지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 스크립트가 하는 일은 컴퓨터 이름_코드.sparsebundle라는 디스크 이미지를 홈 디렉터리에 임시로 만든 후, 아까 그 네트워크 드라이브로 옮기는 것 같다. 내 컴퓨터에서는 파일 복사 오류가 났는데, 파일은 홈 디렉터리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그 만들어진 ...sparesebundle을 수동으로 그 네트워크 드라이브로 옮긴다.

그 다음 여기에 있는 파일을 받아 터미널에서 install.sh를 실행한다. my data is doomed!라고 입력하게 하는데 장난 같다. 소스 코드를 열어 보면.

그 다음 터미널을 열고 아래의 명령을 실행한다.
defaults write com.apple.systempreferences TMShowUnsupportedNetworkVolumes 1

그리고 타임 머신을 실행하면, 아까 만든 드라이브가 이제 보인다. 

이제 마음껏 타임 머신을 쓰면 된다. 참고로 위의 창에서 옵션으로 들어간 후, 타임 머신에서 제외할 디렉터리를 골라서 뺄 수 있다. 백업할 필요가 없는 디렉터리를 빼면 훨씬 적은 공간으로 빠르게 백업할 수 있다.

사악하고 악랄한 기독교의 성경

성경에서 성(聖) 자 좀 떼자. 그냥 기독경이라고 하면 안 될까? 성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지 않는 한, 성경은 절대 성스럽지 않다. 특히 구약.

신명기 20장을 보자.
http://www.holybible.or.kr/B_RHV/cgi/bibleftxt.php?VR=0&CI=1300&CV=4&KY=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찌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
쉽게 말하면
주변에 다른 민족의 나라가 있는데, 공물을 받고 종으로 부리고 싶으면, "우리한테 돈 바치고, 우리 명령을 따르는 종이 되면 너희들 안 죽이고 가만히 놓아 둘 게"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자고 해라. 만약 그 나라가 반발하면 공격해서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나 재산들은 다 뺏아서 너희들이 가져. 우리 하나님이 다른 민족 나라도 다 우리 거라고 했어, 다 뺏고 다 죽여 버려.

이 거다. 이런 개거지같은 논리가 어디있어? 일본에 저런 신이 있어서 우리 나라로 와 가지고는 자기네 신이 저렇게 말했다면서 "조공을 바치고 우리를 섬기면 평화롭게 지내 주고, 안 그러면 한국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와 재산은 뺏어 갈 거다, 우리 신의 명령이다." 이러면 당신은 "아, 예, 자비로운 신 만세!" 이럴 거야? 이 따위 주장이 있는 책을 정말 한 치도 틀림 없는 신의 기록이라고 믿고 울고 불고 하는 건가?

도대체 크리스천들은 저 개같은 구절을 어떻게 무마하고 있을까 싶어서 웹을 검색해 보았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nfreedom&logNo=60129322094
크리스천의 일반적 회피 논리를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강조하기.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이 부분을 굵게 강조해, 신이 평화를 원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는 저게 평화야? 조공 바치고 종이 되는 게?
그리고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죄악이 가득 찬 민족"이라는 것을 삽입해서,  그런 나쁜 민족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게 당얀하다고 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길래 아빠는 죽이고, 엄마와 아이는 타민족의 종이 되는데? 도대체 이 게 어떻게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신인데? 말 좀 해 보시지.

http://parknanum.com/modules/board/bd_view.html?id=cmFree&no=1982
이스라엘의 전쟁은 영적 전쟁이었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원문에 평화를 받아 들이면 공물을 받고, 아니면 여자와 가축을 뺏으라고 되어 있는데? 아, 네네, 마치 십자군 전쟁이 재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성전"이었던 것처럼이군요. 원래는 하나님의 논리를 억지로 주입시켜 강제로 지키게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말을 안 들어서 다 죽였고, 원래 재물에는 관심 없었는데, 다 죽여서 주인 없는 재물이 되었으니 그냥 내가 가져가는 거야, 뭐 이런 거군요.
이 저자는 또, 이 전쟁은 사람이 대상이 아니고 사탄이 대상이라고 한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안 믿으니까 죽이는 것이므로 우리나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사탄의 책임이라고 한다. 연쇄살인범이냐?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쇄살인범을 보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면서 각종 핑계로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사회의 책임, 자기 환경 책임을 한다. 기독교의 논리는 이 것과 똑같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신인데, 안 믿으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내가 다 죽일 거다. 그런데 이 건 사탄에게 홀려 안 믿은 그 놈의 잘못이지 죽이는 내 잘못이 아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이 바이러스처럼 퍼지기 전에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잘 살고 있었다. 물론 그 나라에는 도둑놈들도, 연쇄 살인범들도 있었고,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귀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라의 어느 나쁜 놈도 모든 남자를 다 죽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 상황이 당신들이 들어와서 당신들 신을 안 믿는다고 남자를 다 죽이고, 여자와 아기는 종으로 만드는 상황보다 더 나쁘지? 제발 부탁이다, 크리스천들아, 그냥 오지 마라.

크리스천들의 반박은 다음과 같겠지.
저건 구약 시대의 논리잖아요. 당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일 뿐이예요.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단순히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현대 및 앞으로도 크리스천의 행동을 규정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 게 그냥 역사 책에 나오는 고대 악법의 한 구절 (예, 도둑질을 한 자를 노비로 삼아라")이라면 그렇게 넘어 갈 수 있다. 아무도 역사 책의 구절을 믿고 따르고, 현대에서 그대로 지키려고 생각을 안 하니까. 그런데 저 건 아니다. 저 건 크리스천들의 논리에 따르면,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변의 하나님이 기록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절대 진리를 담은 책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외우고 따라야 할 책이지. 그런데 그런 신이 3000년 전에는 저렇게 명령을 했다가 지금을 마음을 바꾸었을까? 지금은 자기 말을 안 따르는 사람을 좋게 인정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까?
현대인이라면, 설사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진화에 따른 보편적 상식과 질서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저런 구절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저 블로그의 목사처럼, 저런 내용을 자랑스럽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저기에 세뇌되는 사람과 아이들이 계속 발생할 것이다.
성경 전체를 읽어야 됩니다. 저렇게 한 구절만 보면 안 돼요.

저 성 공격 내용의 앞 뒤 단락은 성 공격 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 앞 뒤 문맥으로 내용이 바뀔 것이 없다. 설사 문맥이 있다 한들, 도대체 무슨 상황에서 모든 남자를 죽이고 아이들을 잡아 가서 노예로 만드는 게 (호흡 있는 자를 다 죽이라고 했으니 아이도 죽일 수도 있는 거지) 사랑과 정의가 되는 거지? 다시 말하지만 일본이 우리 나라에 와서 저런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 봐라. 성경 전체를 읽어도 저렇게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내용은 매우 많다. 맞다, 신약을 보면 사람을 사랑하라 뭐 이런 것도 있지. 하지만 그 두 개가 상쇄되는 게 아니다, 모순적으로 공존할 뿐이다. 왜냐고? 구약은 옛날 야만스럽던 유대인이 히브리어로 쓴 책이고, 신약은 로마와 그리스의 문명을 접해서 문명화된 유대인이 그리스어로 쓴 책이거든.
전체로 판단하라고 주장하려면, 우리 민족을 공격하지도 않는 타민족을, 우리 신을 안 믿었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하고 재물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고 사랑에 넘치는 행동이 될 수 있는 상황을 하나만 만들어서 내게 알려 주시오. 
 아이들에게 저런 성경 내용을 포장/미화해서 가르치지 말자. 아직도 중학교 성경 시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자식을 죽여 불태우려고 했던 것을 아주 정의롭고 본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아이들에게 교육했던 목사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